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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인가, 성숙인가?

작성자 사진: 정환 조
정환 조
8시간 전
8분 분량

사사기 15:1-20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밀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삼손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가서, 장인에게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장인은 그가 아내 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 그리고 장인은 다른 제안을 하였다. “나는 자네가 그 애를 몹시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자네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다네. 사실은 동생이 언니보다 더 예쁘니, 부디 그 애를 아내로 삼아 주게.” 3 그러자 삼손이 그들에게 “이번만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어떤 손해를 끼친다 해도 나를 나무라지 못할 것이오” 하고 말하면서, 4 나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꼬리를 서로 비끄러매고는, 그 두 꼬리 사이에 가지고 간 홰를 하나씩 매달았다. 5 그는 그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여우를 내몰아서, 이미 베어 쌓아 놓은 곡식가리에 불을 놓았다. 불은 곡식가리뿐 아니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까지 다 태워 버렸다. 6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알아 보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딤나 사람 곧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들러리 섰던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기 때문에, 삼손이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로 올라가서, 그 여자와 그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였다. 7 그러자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이렇게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기 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8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쉬고 있었다. 9 블레셋 사람들이 쳐올라와서 유다 땅에 진을 치고는, 레히 지방을 짓밟았다. 10 유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치러 올라왔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삼손을 잡으러 왔소. 삼손이 우리에게 한 대로, 우리도 그에게 갚아 주겠소.” 11 그래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말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지 않소? 그런데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이 미치게 하오?”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나에게 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갚아 주었을 뿐이오.” 12 그러자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당신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 주려고 왔소.”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오.” 13 그들은 삼손에게 다짐하였다. “결코 죽이지 않겠소. 우리는 당신을 묶어서 그들에게 넘겨만 주겠소. 결코 우리가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소.” 그리고 그들은 새 밧줄 두 개로 그를 묶어서, 바위 동굴에서 데리고 나왔다.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나오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에 주님의 영이 그에게 세차게 내리니, 그의 팔을 동여매었던 밧줄이 불에 탄 삼 오라기같이 되어서, 팔에서 맥없이 끊어져 나갔다. 15 마침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손에 집어 들고, 블레셋 사람을 천 명이나 쳐죽이고 나서, 16 이렇게 외쳤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17 이렇게 외치고 나서, 삼손은 손에 든 턱뼈를 내던지고, 그 곳 이름을 라맛레히라고 불렀다. 18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 19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시니,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제정신이 들어 기운을 차렸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레히에 있다. 20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은사인가, 성숙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삼손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하고, 블레셋 사람들도 폭력에 폭력으로 대하는 폭력의 사이클이 돌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방식은 이렇게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갚습니다. 삼손도 가나안의 방식에 따라, 힘의 논리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손 개인의 문제 해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 자체가 이루어지고 성취되고 있습니다.

삼손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폭력적인 인물인지, 또 얼마나 성숙하지 못한 인간인지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셔서 이 일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삼손이 보여 주는 이 폭력적인 성향은 은사에 따라 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숙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드러나는가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은사가 나타날 수 있고, 은사에 따라 우리의 능력이 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은사가 드러나는 것보다 성숙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고, 능력이 드러나는 것보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한가운데에 사랑을 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밀 추수 때 아내를 찾아간 삼손 (15:1)

얼마 뒤 밀 추수 때가 되었을 때, 삼손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가서 장인에게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삼손은 참 이상한 인물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데리고 와서 함께 살든가, 아니면 결혼에 대한 확실한 마무리가 있어야 하는데, 밀 추수 때에 불쑥 찾아가서는 "침실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굉장히 안하무인이고 막무가내인 인물입니다.

장인의 다른 제안 (15:2)

장인은 그가 아내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안을 합니다. "나는 자네가 그 애를 몹시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자네 친구에게 아내로 주었다네. 사실은 동생이 언니보다 더 예쁘니, 부디 그 애를 아내로 삼아 주게."

그런데 삼손이 이상한 것만큼이나 장인도 이상합니다. 딸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생이 더 예쁘니 동생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치 야곱을 속였던 라반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 떠나서, 삼손이든 장인이든 성윤리와 도덕의 개념이 굉장히 낮아져 있는 모습을 이 짧은 본문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우 삼백 마리와 불 (15:3-5)

삼손은 "이번만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어떤 손해를 끼친다 해도 나를 나무라지 못할 것이오" 하고 나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꼬리를 서로 비끄러매고,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매답니다. 그리고 그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여우를 내몰아, 이미 베어 쌓아 놓은 곡식가리에 불을 놓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결혼하려던 여자의 집에 쳐들어가 **"불로 사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굉장히 끔찍한 협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삼손이 그들의 재산을 불태웁니다.

지난 본문에서 삼손은 자기 아내를 암소에 빗대어 "나의 암소로 밭을 갈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비하하고 모독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을 불태움으로써 그들의 생산성 자체가 불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풍요의 신 바알에 대한 심판

이것은 사실상 풍요의 신이었던 바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의 풍요로움이 완전히 꺾이고 사라져 버리는 모습입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한 사람이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한 힘과 능력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힘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풍요의 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문제는 성숙도다

그래서 삼손은 분명히 은사와 힘과 능력이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성숙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성숙도는 현저히 낮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은사와 성숙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자와 아버지를 불태운 블레셋 (15:6)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아보았고, 딤나 사람 곧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들러리 섰던 친구에게 주었기 때문에 삼손이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복수해야 할 대상은 삼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에게 복수합니까? 그 여자와 그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입니다.

폭력의 악순환, 힘의 논리

굉장히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 악의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힘의 논리였고,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볼 때 힘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부수고, 불태우고, 살인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힘으로는 삼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여자와 아버지를 죽인 것입니다. 이런 힘의 논리에 따라 폭력이 전가되면서, 이 지역에 끔찍한 악의 고리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15:7-8)

결국 삼손이 또 나서서 이 폭력의 사이클을 다시 재현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기 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어떤 무기가 사용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폭력의 사이클을 통해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했나

그렇다면 블레셋이 이만한 피해를 입은 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여기서도 우리는 엄청난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삼손이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비록 개인적인 복수였지만 블레셋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사사로 등장할 삼손과 함께 블레셋을 더 크게 무찔렀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손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읽게 됩니다.

삼손을 잡으러 왔소 (15:9-10)

블레셋 사람들이 쳐올라와 유다 땅에 진을 치고 레히 지방을 짓밟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치러 올라왔소?" 하고 묻자, 그들은 "삼손을 잡으러 왔소. 삼손이 우리에게 한 대로, 우리도 그에게 갚아 주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폭력이 계속 흘러가며 사이클로 돌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 삼천 명 (15:11)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내려가 삼손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삼천 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유다 사람 삼천 명이 한 사람을 잡으려고 에담 바위 동굴로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삼손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비치는데, 삼천 명이 그를 따라가 어떻게든 제어해 보려고 합니다.

힘의 논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숫자로 밀어붙이고, 힘으로 밀어붙이고, 안 되면 더 큰 힘으로 밀어붙이고, 복수하고 갚아 줍니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여기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시려는 것, 이것 하나만 지금 완성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세상 방식의 폭력과 힘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묶어서 넘겨주겠소 (15:11-13)

삼손은 "그들이 나에게 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갚아 주었을 뿐이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우리는 당신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 주려고 왔소" 하고, 삼손은 "그렇다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오" 하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다짐합니다. "결코 죽이지 않겠소. 우리는 당신을 묶어서 그들에게 넘겨만 주겠소."

사실 이것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말입니다. "더 큰 악에게 너를 넘겨줄 뿐이다." 힘의 논리에서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 더 큰 악에게 넘겨주겠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 밧줄 두 개로 삼손을 묶어 바위 동굴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주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나오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주님의 영이 그에게 세차게 내리시니, 그의 팔을 동여매었던 밧줄이 불에 탄 삼 오라기같이 되어 맥없이 끊어져 나갑니다.

능력의 근원은 주님의 영

본문은 이 능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다시 명확하게 말해 줍니다. 주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셨을 때입니다.

악의 사이클이 돌아가고, 폭력이 자행되고,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나 아름다움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나귀 턱뼈, 부정한 도구 (15:15)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를 보고 손에 집어 들어, 블레셋 사람을 천 명이나 쳐죽입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 턱뼈는 결국 주검의 일부입니다. 부정한 도구라는 말입니다. 부정한 도구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법에 합당한 일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부정한 도구, 십자가

부정한 주검을 가지고, 부정한 도구로 적을 무찌르는 이 행위가 어디에서 완성되는지 생각해 보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강력한 수치의 도구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적인 방식의 악과 폭력과 힘, 그리고 부정적인 도구들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일하시고 그 모든 것을 관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부정한 도구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바꾸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부정한 우리에게도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부정한 도구, 부정한 장소, 부정한 상황 가운데에도 오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부정한 우리에게도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얼마나 거룩한 삶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멈춤 없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런 부정한 도구조차 굉장히 큰 은혜로 다가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15:16-17)

삼손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그리고 손에 든 턱뼈를 내던지고, 그곳 이름을 라맛레히라고 부릅니다.

목마른 삼손의 부르짖음 (15:18)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이 승리가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악의 고리가 작동하고 있었고, 거대한 폭력의 사이클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주님의 영이 계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끼어드셨을 때, 삼손조차 "주님께서 친히 크나큰 승리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기적을 경험하고도 원망하는 삼손

그런데 이 삼손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은사가 발현되었습니다. 거대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합니다. 이것이 삼손이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우리도

우리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놀라운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원망하고 얼마든지 부족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려 내지 않습니다. 삼손에 대한 평가는 절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은혜는 긍정적으로 그려집니다.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 (15:19)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납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제정신이 들어 기운을 차립니다. 그래서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는데, 오늘날까지도 레히에 있다고 합니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을 때 샘을 터뜨리신다는 말입니다. 부르짖는 자에게 생수와 같은 달콤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택하신 은혜

삼손이 긍정적인 인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면,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자에게 생수를 부어 주십니다.

블레셋이 다스리던 시대 (15:20)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블레셋이 다스리던 가운데 사사로 일했던 삼손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주소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힘, 세상의 가치관,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성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연약하고 부족하고, 삼손처럼 기적과 능력은 구하지만 성숙은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의 묵상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능력과 기적과 힘, 은사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뒤에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 더 나은 사랑의 대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나의 삶이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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